'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억울한 옥고를 치렀던 학암 이관술 선생(1902-1950)이 사건 발생 79년 만인 지난해 12월 22일 사법부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그의 고향인 울산에서는 "신속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관련 기사 : 누명 벗은 이관술 고향 울산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목소리)
1월 28일,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씨가 정부세종청사의 국가보훈부를 방문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공적조서 접수)했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정판사위폐사건 재심 무죄확정으로 이관술의 서훈에 걸림돌은 없다"고 밝혔다.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신청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20년, 첫 신청 때는 서훈심사에서 "독립운동은 확실하지만 해방 후 행적으로 보류한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정판사위폐사건 연루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고 확정됐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접수를 받은 보훈부 심사관계자가 '오늘 유족이 신청하기 전에 이미 다른 단체에서 신청이 접수돼 있다', '이관술 재심이 무죄로 확정된 이후 각지에서 전화문의가 답지했다'는 사실을 전했다"며 "단 '신청이 워낙 많은 관계로 서훈 시점이 늦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고 전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절차는 신청서 접수 이후 1·2차 심사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울산노동역사관측은 "늦는 경우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맞춰 서훈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이관술 선생은 울산 울주군 범서 출신으로 서울 중동고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고보 교사시절인 1930년 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관술은 1932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경성반제동맹, 경성트로이카, 경성콤그룹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 두 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탈출을 거듭하며 7년 이상 수배 명단에 올라 일본 경찰의 최우선 체포 대상이었다.
그 결과 해방 후 잡지 <선구>의 정치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지도자 순위 중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에 올를 정도로 대중의 신망이 높았다. 하지만 1946년 '조선정판사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 3일에 대전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이관술기념사업회는 2월 1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김용만 국회의원과 함께 '학암 이관술 선생 재심 무죄 판결과 역사 정의 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국회 토론회를 개최한다.